2008년 03월 18일
내가 만났던, 프라다 안 입은 악마
+ 내가 만났던, 프라다 안 입은 악마
영어로 Devil의 어감은 아무래도 우리말로 번역했을 때 악마하고는 좀 다른 듯 하다.
Native가 아닌 내가 느끼기에 Devil이란 단어는 진짜로 사악한 느낌을 주는 반면에,
악마는 왠지 귀엽고 친근하다.
악마하면 크눌프 님의 우.주.상.에 나오는 광렬이 떠오르니... ㅎㅎ
(제가 혹시 Devil이란 말의 느낌을 잘못 알고 있는 거면 지적해 주시길...)
그래서 악마란 말이 주는 느낌은 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에 어울린다.
기본적으로 해피엔딩과 판타지를 지향하는 대중영화의 속성 상, 이 영화에 악마란 없다.
* * *
Pink Floyd가 노래하듯이 편집광(Paranoid)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다.
아무리 홍상수가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라고 자조해도
그들은 포름알데히드 없이 기꺼이 괴물로 변태하는 길을 택한다.
차탈래부인께서 한 시인의 입을 빌려서 얘기한, "정신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들"은
워커홀릭에 새드스트이고,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약해야 살아남는 법칙을 본능적으로 몸에 익히고 있다.
그들은 프라다는 입지 않았지만,
편집광이고 괴물이고 정신파탄자이고 워커홀릭이고 새드스트인 그들은
이른바 우리가 직장에서 상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바로 내가 만났고, 또 만나고 있는 악마들이다.
* * *
오늘 낮에 그 악마들 중 가장 악독했던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 언젠가 November님의 종로 기행기, 종로에서 우두커니 섰다, 에
답글로 달았던 글...
http://www.mediamob.co.kr/spiggy/blog.aspx?ID=106791
종로에서 한때 회사를 다녔습니다.
아래 직원 괴롭히기로 악명높은 팀장 밑에서 일할 때,
그 팀장은 회사 식당에서 밥먹고 직원들과 꼭 종로 1가를 한바퀴 돌았지요...
당시에 팀장의 총애(?)를 받던 터라
산책할 때는 자주 저를 옆에 데리고 가더군요...
다른 직원들은 "네가 팀장 책임져라" 그러면서 좋아라 뒤에서 따라오고...
열심히 대화에 맞장구치며, 온갖 화제를 다 주어섬겼지만,
그때 걷던 종로 1가 거리는 참 우울했지요.
그리고 가끔 점심 약속 핑계 대고 혼자 빠져나와
교보문고 뒤 버거킹에서 햅버거 먹고, 혼자 걷던 거리...
팀장 만날 가능성이 있던 종로 쪽으로는 못가고,
세종문화회관 뒷거리와 경복궁 거리, 어쩌다가는 인사동 거리까지...
더 어쩌다가는 시청앞을 지나 덕수궁 돌담길까지...
제 사유는 어쩌면 그때 형성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스스로를 분열시키며 사는 법을 어쩌면 그때 배웠는지도 모르겠네요...
2년 정도 모시던 팀장인데, 그는 이제 팀원으로 강등되었고,
예전 자기 팀원을 팀장으로 모시고 있다.
(나는 정신적 스승도, 부모님도 아닌, 직장 상사에게 "모시다"라는 말을 쓰는 걸 싫어하지만,
워낙 이 동네에서 널리 쓰는 말이어서...)
이제 회사에 다시 인사철이 다가오면서,
아마 여전히 팀장 자리가 없어서 답답한 마음에 술 한잔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베트남 핸드폰 말고 로밍폰도 있기에 전화는 연결이 되었는데,
그는 내가 베트남 주재원으로 간다고 연락도 안하고 갔던 데에 대해 많이 섭섭해 했다.
나갈 때 정신없이 바빠서요... 라고 핑계는 댔지만,
그렇게 그는 자기의 전락한 처지를 더 실감했으리라...
나란 놈도 그렇다.
그와 끈끈한 정 따위는 당초에 없었지만, (그는 아마 있었다고 느끼겠지만...)
나도 이미 썩은 동앗줄에 공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아마 다 잊어버렸겠지만,
이 회사가 네번째 회사만 아니었으면 벌써 사표를 그의 얼굴에 던졌을,
그 끔찍했던 순간들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가 실컷 일 부려놓고 내 뒤통수 쳤던 경험들을 생각하면,
전형적인 워커홀릭, 새디스트인 그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사람이 네다섯명이 되고,
(나와 같은날 입사했던 스페인어 전공의 친구까지도 석달 만에 회사를 그만뒀으니...)
다른 팀으로 옮긴 사람까지 하면 열댓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내가 그와 더이상 관계를 이어갈 의무는 없는 거다.
그런데도 왜 나는 그에게 연락을 안하고 베트남 온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
친구들 중에서도 제대로 연락 못한 친구들이 많은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원작자처럼
이전의 못된 상사에게 복수하기 위해 소설을 쓰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여전히 윗사람이면 껌뻑 죽는 유교적, 혹은 봉건적 관습에 충실한 것 같고,
인질이 인질범을 사랑(?) 혹은 이해하게 된다는 스톡홀름 신드롬에 걸려있는 것도 같다.
제가 회사에서 느끼는 관계에 대한 생각은
제가 예전에 올렸던 "지배와 복종, 그리고 자유" 라는 글을 참고하시길...
http://www.mediamob.co.kr/simyon21/blog.aspx?ID=118001
* * *
영화는 예쁘다.
품위있거나, 귀엽거나, 섹시한 옷 만큼이나 사람들도 결국은 다 착하다.
머랜다는 업무 능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알고보면 속깊은 배려도 할 줄 알고,
불행한 가정생활에 힘들어하는 약한 모습도 가졌다.
이쯤되면 그의 괴퍅하고 안하무인적인 성격은 오히려 그만의 멋진 악세사리가 된다.
앤드리아는 당연한 수순처럼 그런 그에게 기꺼이 항복하고,
그에게 완전히 항복한 순간에 그의 품을 뛰쳐나간다.
이 예쁜 영화가 판타지로 변하는 순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영화는 이게 바로 성장이고, 자아실현이라고 얘기한다.
신데렐라가 백마탄 왕자를 만나는 게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신데렐라가 왕자에게서 기꺼이 벗어날 수 있는 데까지 이제 이야기는 진보했다.
하지만, 판타지는 판타지이고, 동화는 동화일 뿐이다.
현실에선 앤드리아의 행동은 객기일 뿐이고,
그렇게 떠나도 최고의 추천서를 써줄 상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 * *
다시 내 얘기로 돌아오면, 나도 앤드리아처럼 악마를 떠났다.
다행히 2년 만에 팀이 해체되었고, 팀장은 새 팀으로 오라고 나를 불렀지만,
나는 따라갈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예전에 같이 일하던 직원들끼리 얘기한다.
옛날 그 팀장이 고마워.
이제 내성이 생겨서 어떤 악독한 팀장을 만나도 일하기 편해...
지독한 압제자가 있으면, 아래 사람들끼리는 끈끈한 정이 생긴다.
그리고 그 팀장은 팀원들끼리의 경쟁구도를 만들어 압제에 대항하는 힘을 무력화시킬 만큼
영리하지도 못했다.
어쨌든 나는 그를 떠날 기회만을 노렸고, 기회가 왔을 때 기꺼이 떠났다.
그것도 기회라면 말이다...
* * *
그 영화에서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나는 당신처럼 (남을 배신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앤드리아의 투정같은 말에
머랜다가 "Everybody want this... Everybody want to be US" 라고 얘기하며
아주 우아한 포즈로 차문을 열고 카메라가 터지는 패션쇼장으로 나가는 부분이다.
나는 내게도 물어 보았다. 너라면 저렇게 살고 싶겠냐고...
내 대답은 X맨에 있었다. 당.연.하.지...
기회가 안돼서, 능력이 안돼서 그렇게 못살 뿐...
영화에서는 성장이 굴러온 기회를 박차고, 자기가 원하는 삶을 찾는 걸로 표현되지만,
(패션잡지와 지성인 대상 고급잡지의 차이는 도대체 뭔데?
앤드리아가 구제할 수 없는 패션꽝이어서 패션계에 전혀 적응할 수 없는 사람도 아니고,
사실 누가 앤드리아에게서 "작가"의 모습을 보나, "패션 리더"의 모습을 보지...)
내 현실에서의 성장은 못 올라갈 나무는 기꺼이 포기하고,
내가 올라가 있는 나무를 정성들여 가꾸는 데에서 온다.
세상은 내게 많은 길을 익히 보여줬지만,
하나의 길을 택하면 다른 길을 포기해야 함을,
하나의 길이 다른 길을 부러워하고 탓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성공의 길을 앞에 두고, 다른 험한 길을 택한 판타지의 주인공 앤드리아는
그의 선택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그런 선택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나같은 소시민에게 위안을 준다.
저런 애도 소박하게(?) 살고 싶어하잖아....
* * *
나는 내가 갈수록 악마가 되어간다는 걸 느낀다.
욕하면서, 혹은 싸우면서 닮아간다고,
내가 가장 싫어하던 그 팀장의 모습을 내게서 느낄 때가 많다.
베트남에 와서 베트남 직원들을 거느리고 일하게 되면서,
나도 갈수록 아래 직원들을 집요하게 괴롭히게 되고, 소리도 치고, 책상도 치게 된다.
내가 악마가 되어간다고 내 미래가 머랜다만큼 화려해질 것도 아닌데,
불안한 미래가 키워가는 내 안의 악마성이 나는 그래서 더 못나보인다.
악마가 되어도 근사해 보일 수 있으려면 머랜다 정도는 되어야지...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팀장과 내 미래의 모습이 다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내 착각일 뿐이고, 사실 그 정도 위치까지 올라가는 것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 * *
아내와 같이 이 영화를 봤다.
나는 아내에게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내 회사생활이 생각나서 동병상련했다고 했고,
아내는 그런 것 따위는 관심없고 옷만 본다... 저 치마 너무 예뻐...
아내는 이 영화에서 자극받은 대로, 지금 검은색 드레스를 만들고 있다.
며칠 뒤면 회사 송년 파티인데,
우리나라에선 파티갈 때 드레스 안 입어도 돼 라고 계속 주입시키지만,
아내는 우리나라 여자들의 파티 패션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아내는 옷감 사는데 20만동 (약 1만3천원) 밖에 안 들었다고 자랑한다.
내가 미몹에 글 쓰면서 회사일 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풀 듯이,
아내는 옷 만들면서 집안일 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
그러면서 옷값도 많이 아낄 수 있지 않냐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리고 요새 계속 느끼는 거지만,
아무리 내가 투정을 부리더라도,
회사일이 집안일하고 애 돌보는 것보다 열배 정도는 더 쉬운 듯하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여전히, 앞으로도 계속, 미안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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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3/18 13:16 | 살다보면 | 트랙백 | 덧글(1)





Band of Brothers에도 나오죠. E중대를 하나로 묶은 것은 꼴통 소벨 대위였다고. 그에 대한 적개심으로 중대가 하나로 똘똘 뭉치게 되었다고.ㅋ
사람 사는 건 어딜 가나 다 비슷한가 봅니다.
Band of Brothers를 보진 않았지만,
님의 리플을 읽으니 왠지 그 시리즈를 보고 싶어지네요...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 꼴통 대통령이 있을 때는
그에 대한 적개심으로 다들 똘똘 뭉쳤는데,
요새 민주적인 대통령이 있다 보니 다들 그리 말이 많은건지요...
제 직장상사가 아직까지 부사장으로 건투하고 계시지요.
긴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잘 잊혀지지 않네요.
몸이 아파서 야근 안하고 정시에 퇴근하겠다고 하면 갖은 인상을 다 쓰고 동료간의 화합을 말씀하시고 자신은 대낮에 고향팀 야구 응원가셔서 비내리는 호남선을 열창하시고.
그 팀이 이긴 날은 무조건 싸구려 부페에서 회식, 다음날 측근이었던 박과장이 또박또박 그 밥값을 다시 걷어서 드렸었던 기억.
오년을 못견디고 무너지실줄 알았는데 계속 건승하시니 부럽기도 하고 거기 불어서 나도 둍을 빨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들고
옛날에는 상사가 아래 직원을 잘 괴롭힐수록 더 인정을 받았었는데,
요새는 Fun 경영,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겅호 이런 화두가 뜨면서
직장 상사들도 많이 변해가는 것은 같더군요.
그런데 같이 야근하는 워커홀릭 상사는 새디스트여도 어느 정도는 용서가 되는데, 치사한 상사는 정말 한대 때려주고 싶더군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안드레아가 허상을 쫓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요. 런웨이는 드러내놓고 허상을 쫓는 삶을 추구하는 잡지라 차라리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실제 원작자도 어차피 그런 대중소설을 써서 돈을 왕창 벌었으며, 영화판권까지 팔았으니 (후속작품은 그리 인기가 없는듯), 결국은 자기도 영혼을 판 셈인가요? ^^
미국영어에서도 Devil이 그리 사악함에 충만한 단어는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미국 남부 사립대학 명문인 Duke 대학의 마스코트는 Blue Devils지요. The Devil Wears Prada라는 책의 제목에서는 devil = bitch 정도로 쓰인다고 보여집니다. 일반적인 악마라는 존재가 프라다를 좋아한다는게 아니라, "(내 보스였던) 그X은 프라다만 입더라" 라는 함의가 있지요.